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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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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9/10월 딸깍발이 생각 2017. 0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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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을 늘 '먼저 안 것'의 자세로 살기

 

영화 <너의 이름은>

 

 

TV를 켜 본다. 유명 연예인이 나와 우아한 전원생활을 공개하고, 어떤 연예인은 사람들을 초대한다. 자신의 텃밭을 가꾸거나 마당의 잔디에 누워 요가를 하거나, 명상을 한다. 부럽다. 시골로 내려가 싶다. 그래서 휴가 때가 되면 도시의 사람들은 자연이 있는 바다나 계곡, 산을 찾아 나서는 걸까?

 

하지만 몇 십 년 째 강원도 외지에서 살고 있는 나의 지인은 서울은커녕 읍내에서 살아봤으면 하는 게 소원이라고 한다. 왜 우리는 늘 서로 다른 꿈을 꾸고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동경하며 사는 걸까.

 

이런 비슷한 종류의 영화가 있다. 바로 <너의 이름은>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인 이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울림이 크다. 보통 이런 울림을 일본어로 히비키(ひびき)라고 하는데, 울림은 존재와 존재, 사물과 사물들이 있기에 가능하다.

 

-쫓겨 사는 삶과 무료한 삶-

 

아르바이트와 학교를 오가며 도시적 삶에 '쫓겨 사는' 고등학생 소년 타키와 시골에서 '무료하게 사는' 소녀 미츠하는 어느 날 아침 서로의 몸이 바뀐 것을 알게 된다. 잠들고 나서 일어나면 자신도 모르게 바뀌는 모습에 처음에는 당황해하지만 이내 바뀐 몸을 '인식'하고, 바뀐 상황에서 점차 서로의 존재를 위해 살아간다.

 

집안 대대로 신사(神社)지키며 살아가는 미츠하는 할머니와 여동생과 살아간다. 설정 자체가 전통이나 풍습을 암시하고 있고, 반대로 도시의 삶을 살아가는 타키는 늘 변화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도시를 보여주고 있다.

 

풍습에 의해 자신의 신사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미츠하는 도시를 동경하며, 다음 생에는 꼭 도쿄의 꽃미남으로 태어나길 바란다. 늘 자신의 결핍에 대한 충족의 대상이 상대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미츠하는 이제 성별까지 뒤바뀌길 바라는 것이다. 아르바이트까지 하면서 바쁘게 살아가야하는 타키도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영화 속 주인공만 그러는 걸까? 우리도 늘 자신의 삶 속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상대의 삶을 두리번거리며, 배회하고 있지는 않는가. 영화 속 주인공들은 일주일에 두세 번씩 서로의 몸이 바뀌었다가 제자리로 돌아와 꿈에서 깨면 기억을 못하게 된다. 그래서 서로는 '문자'를 남기며 서로에게 필요한 '소통'을 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도 우리가 기억을 하지 못할 뿐, 이들처럼 수많은 꿈들을 매일 꾸고 있지는 않을까.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깨어나서는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고, 이야기를 하며 내러티브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왜 서로를 알아보지 못할까-

 

그런데 마지막 영화 엔딩 장면을 보면 영화 속 주인공들은 서로를 알아보는데 우리는 왜 그러지 못하는 걸까. 이건 애니메이션 영화니까? 사실 그 보다는 우린 꿈 자체를 믿지 않고, 그 넘어에 있는 것 자체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현실에 몰두하느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영화의 배경은 1200년 만에 혜성이 다가오는 일본이다. 하지만 이 혜성이 갈라지면서 운석이 일본 미츠하가 사는 곳으로 떨어지게 된다. 이 사실을 '먼저' 알게 된 타키는 미츠하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노력하지만 자신과 미츠하 사이에 3년이라는 시간이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된다. 즉 타키는 미츠하보다 3년 더 먼저 존재한 것이다.

 

상대성 이론에 따른면 시간의 차이는 중력과 운동의 법칙에 의해 달라진다. 이중 전자는 중력이 가까울수록 시간이 천천히, 중력이 멀 수록 더 빨리 흐른다는 이론이다. 후자에 속하는 운동의 법칙을 살펴보면 빛의 속도를 시간이라고 보면 정지된 상태의 빛보다 움직이는 가운데 빛의 경우 다시 말해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면 상대적으로 정지해있는 빛보다 시간이 느리게 간다는 이론이다.

 

타키는 운석으로 인하여 마을이 소멸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열심히, 정말 열심히 움직인다. 자신의 몸이 부셔질 정도로 움직이는 그의 과정이 물리적이라는 3년의 시, 공간의 차이를 극복하게 만들고 미츠하에게 이 '사실'을 알릴 수 있게 된다. 미츠하도 자신에게 주어진 물리적 시간 안에서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여 마을을 구하게 된 것이다.

 

-구조적 형태에 매몰되지 않기-

 

여기서 둘 다 목숨을 걸고 몸을 바쳐 마을을 구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주는 시사점이 있다. 어찌되었 건 마을이 위험하다고 '먼저 안' 것은 타키였다. 타키가 그저 몸이 바뀐 '현상'에 대해 인정하고 그 구조적 형태에 매몰되었다면 마을을 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타키는 미츠하라는 소녀에 대해 '너는 누구니'라는 지속적인 '관심'을 통해 마을의 위험까지 알게 된 것이다. 미츠하도 타키라는 '너는 누구니'라는 관심이 없었다면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하나 더 생각해야 하는 게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은 늘 '먼저 안 것'이 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무엇이 타키가 먼저 알았다고 생각한 그 무엇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정말 서로에게, 또는 인류에게 꼭 필요한 무엇을 알았다면, '누군가도 알겠지 혹은 이미 알았겠지'라는 생각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안 것'이 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럴 때 미처 먼저 알지 못했던 사람들은 그 앎을 통해 자신의 처한 상황에서 더욱 더 노력하며 씨너지 효과를 낼 것이다.

-'나는 누굴까'에서 '너는 누구니'-

 

늘 자신의 정체성에 매달려 '나는 누구니' 라는 것만 고민하다보면 주변을 살펴볼 수 없다. 우리에게 타키나 미츠하가 말하는 '너는 누구니'라는 상대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결국 서로의 관심과 소통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역설을 영화는 하고 있는 것이다. 서로 다른 사람이 되어 다른 존재의 꿈을 꾸는 것은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이를 위해 영화 속 대사처럼 우리가 단 한 가지만 기억하면 된다.

 

"말하려고 했는데. 네가 세상 어디에 있든지 간에 반듯이 다시 한 번 찾아가겠다고."

 

이 의지가 8년 후 타키와 미츠하가 다시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이것은 '의지'. 왜냐하면 살면서 매일 마다 우리는 수 도 없이 쏟아지는 새로운 대상과 문제에 부딪히며, 그 전에 것들은 쉽게 묻어져 버리거나 잊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소중한 사람, 잊고 싶지 않은 사람, 잊어서는 안되는 사람....! 누구야...? 이름은...!"

 

우리 주변에 소중한 사람이 있고, 잊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고, 잊어서는 안되는 사람이 있어서 그의 정체성을, 그의 이름을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누구인지 관심을 갖고, 그의 이름을 '명명'할 때 그 사람들이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 잊고 싶지 않은 사람, 잊어서는 안되는 사람으로 존재할 것이다.

 

이제 우리 주변을 보자. 그토록 찾아 헤매던 사람은 바로 당신이

'누구야?, 이름은!'

하고 외치는 노력 가운데 만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시골에 사는 나도, 서울에 사는 너도 서로의 동경의 대상이 아닌 그저 하나로 연결된 '우리'임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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